![선](https://img1.daumcdn.net/thumb/R750x0/?scode=mtistory2&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bOpNhJ%2FbtsDBtqoB05%2F9oNwpNp0Iman8uKY582I20%2Fimg.png)
선을 넘고자하는 욕망
선에 대해
사람들에겐 각자의 선이 있다. 선은 그 사람이 허락하지 않은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용납할 수 있는 거리를 표현한 것이 선이다. 그런데 이 선은 항상 하나만 있지는 않다. 적게는 하나, 많게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의 수 만큼 존재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슬로건을 내세우지만 결국에는 자신과 조금 더 유대감이 있는 사람을 우선시 한다. 사람이 평등하는 논리가 백번 옳다고 해도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런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 수록 순위와 우열이 생기게 되고, 그 순위와 우열에 따라 선의 범위도 달라진다. 더 순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선의 범위는 좁아지고, 순위가 낮은 사람일수록 선의 범위는 넓어진다.
선을 넘는 것
선은 일종의 개인적인 공간이고, 이 개인적인 공간을 지켜주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다. 그리고 이 개인적인 공간을 넘어섬으로서 상대를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보통 '선을 넘는다'고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예의, 예절을 잘 지키기만 하면 선을 넘는 일은 거의 없으며, 자칫 실수로 선을 넘는다고 해도 어느정도의 이해로 넘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선을 넘어 상대를 불쾌하게 하는 것이 숱하게 보인다. 나는 선을 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이 선을 넘는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선에 대한 낮은 가시성과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합쳐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낮은 가시성
애초에 선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다. 선이라는 단어를 통해 최대한 구체적으로 묘사를 한 것이지, 그 선의 범위와 굵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그려진 것이 없다. 애초에 선이라고 했지만 그게 내가 생각하는 것 처럼 굵기가 없을 수도 있고, 유선형의 형태가 아닌 직선적인 형태를 할 수 도 있다. 이렇듯 선의 형태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이 제각각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선에 대한 시각적 묘사보다도 그 범위가 안보인다는 것이 더 크다. 스스로가 선에 대한 시각적 묘사를 정의했다고 해봤자, 상대가 나에게 어느정도의 범위까지 허락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그 사람과 직접 대화를 통해 물어봐야 하는데,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행위가 그 사람의 선 안에 있다면 꽤나 곤란한 상황이 된다. 보통은 간접적으로 돌려서 물어보거나 경험적인 추측으로 선의 범위를 파악하게 되는데, 여기서 꽤나 많은 오차가 발생하게 된다. 수만명의 데이터를 얻었다고 해도, 지금 내가 대화하는 사람은 그 수만명과 다른 특징을 가졌을 테니 말이다.
여기까지는 스스로가 파악을 하는 단계라, 판단은 그렇게 해도 선을 넘지 않을 수 있다. 진짜 선을 넘게 되는 상황은 선이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경험적인 정보로는 이정도 행동까지 되기에 확신을 가지고 행동했지만, 상대가 그 정보 밖의 사람이 되어버리면 선을 넘어버리는 결례를 행하게 된다. 즉, 낮은 가시성과 섣부른 판단이 합쳐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
낮은 가시성이라는 특성은 행위를 발생하게 하는 직접적인 요인은 아니다. 낮은 가시성 때문에 선을 넘는다고 하는 것은 마치 유리창을 깨고 그 안에 전시된 컵케이크를 먹는 행위의 이유를 ‘컵케이크가 맛있어서’ 라고 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컵케이크가 맛있다고 유리창을 깨는 것은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두를 관통하는 요인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이유이고, 그 이유를 나는 특별하고 싶은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런 욕구가 원동력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전에 특별함에 대해서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들에게는 특별함의 범위와 순위가 있다. 시간이 지나 견고하게 쌓인 개인의 특별함에 새롭게 파고 드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이 하고 싶지 않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다. 사람들은 쉽지 않음에도 특별함의 범위에 들어가려고 노력하고, 쟁취해낸다.
때로는 무언가를 하다보면 요령을 피우고 싶어지기도 한다. 목적지를 향해 길을 열심히 달리다가 아래와 같은 지형이 나왔을 때, 사람은 고민하게 된다. 뛰어서 건널 수 있을것만 같으면서도 잘못 뛰면 낭떠러지로 떨어질것 같은 그런 지형에서 사람은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여기를 뛰면 엄청나게 거리를 단축 시킬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여기를 뛰면 앞서가던 사람들을 앞지를 수 있을 거 같은데, 여기를 뛰면…’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면 뛰지 않았을 때는 생각하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뛰는 것에 집중이 되고,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뛰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를 갑자기 왜 했는가 하면, 이 이야기가 특별하고 싶은 욕망으로 선을 넘어버리는 사람의 생각과 같다. 과정을 뛰어넘고 싶고, 빠르게 무언가를 쟁취해내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선을 넘어버리게 만든다.
넘고자 하는 마음
나도 가끔은 선을 넘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다. 무례한 쪽으로 선을 넘기 보다는 스스로의 생각이나 스스로의 마음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를 하거나, 숨겨놨던 사실이든 나의 마음이든 무언가를 고백하고 싶을 때가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편해지고자 하는 마음도 있다. 특별해질듯, 특별해지지 못할것 같은 그런 모호한 선은 내게 압박을 준다. 그리고 그 압박을 견디기 힘들 때가 오면, 차라리 선을 넘어버려서 애초에 내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생기고, 이런 마음은 선을 넘고자 하는 충동으로 이어진다. 처음부터 넘을 수 없음을 느꼈으면 편할거라는 스스로의 합리화에서 나온 마음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할거라는 것도 잘 안다. 내가 편해지는 만큼 상대가 불편해질 것이기에 나는 넘고자 하는 마음을 참는다.